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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나의 밤과 낮

작가 : 정희민 Heemin Chung
디자인 : 맛깔손
페이지 : 그림책176p / 텍스트북104p
발행처 : 우르슬라프레스
제작년도 : 2017

*본 콘텐츠는 인쇄물이 아닌 플랫폼 내 뷰어를 통해서만 열람할 수 있는 전자책입니다.

작가 소개

정희민은 일상에서 흔히 발견하는 이미지들을 소재 삼아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정체성’이라는 단단한 개념을 두드린다. 일시적으로 그려졌다가도 쉽게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며 개인을 지탱하거나 구속하거나 혹은 무너뜨리는 형태와 언어의 외피를 더듬으며 그 단단함에 의문을 제기한다.   

책소개

<백하나의 밤과 낮(그리고 목소리들)>은 정희민이 2013년부터 2015년 사이 서울의 풍경을 그린 아크릴 페인팅 404점을 묶은 그림책과 그 풍경들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묶은 텍스트북으로 구성된다. 책 속의 풍경들은 속도감 있는 터치로 빠르게 흘러가기도, 잔잔한 묘사로 포착되기도 하며 서울의 시간을 담아낸다. 그 풍경들을 스친 단상들, 웅얼거림은 하나의 목소리이자 다중의 목소리로 저마다의 빛을 이야기한다.  

 

“여수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이었다. 꼭 10년 전과 같이 심야 버스에 올랐다. 이번엔 우등으로. 10년 만에 찾은 여수터미널은 공기부터 달랐다. 엑스포의 유물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불 꺼진 터미널은 마치 무덤 같았다. 대합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아침이 되는대로 향일암으로 향할 것이었다. 동이 틀 즈음 관음전으로 들어가는 석문을 지나 펼쳐지는 망가니즈 블루의 서늘하리만치 푸른 바다를 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만 지난 10년간 서서히 나를 좀먹었던 모든 피로가 씻겨갈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그 문을 해탈문이라 불렀다.

이 사찰에는 이름이없다.터에만 이름이 있을 뿐이다. 사찰의 일부는 2009년 겨울,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2012년 복원되었다. 향일암에 화재가 나던 날, 버스에 달린 작은 티비에서 그 뉴스를 봤다. 해를 넘기기 10일 전쯤이었다. 경찰은 방화를 의심하고 있다고 하였고, 허망해하며 눈물을 흘리는 여수 시민들의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향일암은 해맞이 행사를 준비 중일 것이었다. 화재가 있기 바로 이전 해, 주지 스님은 불자들의 불사를 받아 대웅전을 금빛으로 단청하고 열반했다. 경찰은 이듬해 옷 속에 숨겨온 알루미늄 파이프로 삼존불 좌대 장식이며 황금 단청, 불전함 등을 마구 깨부순 이단자 정모 씨를 수배해 조사하였지만 그녀의 알리바이를 허물 수는 없었다. 이들 건물은 1986년 모두 새로 지어졌고 불에 탄 대웅전은 2007년 다시 한 번 재건축을 거쳤다. 제집보다 새것일  이 사찰에 불이 붙었을 때 돌산도의 사람들은 나라를 잃은 것처럼 울었다. 임란을 거쳐 1715년 이곳으로 옮겨온 이래 300년 동안 사람들은 숱하게 벽을 짓고 허물었을 터였다. 셀 수 없는 불자들이 들고났을 겄이었다. 그들의 무릎은 닳다 못해 헤어졌을 것이었다. 나무는 불에 타도 신심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변하지 않은 것은 사찰을 둘러싼 바다와 매일 뜨고 지는 해뿐이었다.

우스운 황금 단청도 이교도의 행패도 하나의 해프닝으로 기억될 즈음 다시 찾은 향일암은 10년전 그와 내가 보았던 그대로인 듯 보였다. 역사의 외곽은 너무도 단정하였다. 뱉을 수도 삼킬수도 없었던 그와의 인연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